LEE KEE HEE _가을에 부치는 편지 
누구세요? 창을 두드리는 분이. 도토리 알밤 떨어지는 소리로 다가오는 당신은. 무심하게 반복되는 시간의 고삐를 늦추라고 타이르는 분은 누구신가요?
딱지 굳어진 첫사랑의 상처마냥 마른 잎의 흔적으로 뒹굴고 계시는군요. 드높이 맑고 푸른 하늘 아래 여린 목숨 가누는 코스모스 향기로 계절을 적시는군요.
부치지 못한 베르테르의 편지처럼 책갈피 속에 남아 생의 발목을 잡고 계신 당신. 저무는 햇살 거두어 황금색 눈부신 명주 한 필 장만하시려고 남은 몇 올의 추억들을 그리 소중하게 다듬고 계신가요? 질긴 이승의 인연을 흔적으로 남길 요량으로 �가을�이란 명찰을 달고 이리저리 헤집고 다니시는가요?
끝은 끝이 아니라는 걸 당신은 가르쳐주셨습니다. 돌아오는 기다림의 시간이었을 뿐 생은 헛발길질하며 헛디디길 반복했지만 당신은 화려한 계절의 옷을 입고 늘 돌아오셨지요.
주인공이 바뀌어도 단막극은 화려하게 펼쳐지는 것처럼. 시간은 등분해서 나누는 정해진 일정표가 아니라는 것도 일러주셨어요. 손목에서 째깍이며 돌아가는 시계바늘과는 상관없이 시간은 바다로 돌아가는 흐르는 강물이었어요. 그 강물 속에서 작은 피라미로 헤엄질했어요.
달력에 적힌 순서대로 계절은 번갈아 오지 않았어요. 꽃피는 봄에 싹이 튼 사랑은 한여름도 못넘긴 채 겨울 잎새로 시들었어요. 태양처럼 빛나던 해바라기의 기쁨도 행복도 쓰나미처럼 하루아침에 날아갔지요.
이젠 풍성한 과일과 햇곡식으로 차려진 축제가 별리의 서곡이란 걸 알게 됐습니다. 앙상한 뼈마디 부딪히는 나무들의 작별마저도 생명을 잉태하는 아픔이란 걸, 고집과 집착을 잠시 땅에 내려놓는 짧은 잠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았지요.
그래요. 시작과 끝은 늘 반복되는 출발이었습니다. 만남과 이별은 상행선과 하행선이 다른 기차를 타는 것처럼. 차표를 잘못 사서 손수건을 흔들었지만요. 그리운 것들은 돌아온다고 갈대 숲 속에서 젖은 목소리로 말씀하셨지요.
풍금, 세발자전거, 탁상시계, 실개울, 감꽃 목걸이, 아지랑이, 노을, 화롯불, 송아지, 진달래, 소쩍새, 민둥산, 수양버들, 찔레꽃, 그네, 귀뚜라미, 뜸북이, 다슬기, 사립문, 방앗간, 느티나무, 우물, 평상, 방울꽃, 우체부, 교통순경, 불자동차, 누렁이, 접시꽃, 탱자나무, 감나무, 동무, 종이학, 곶감, 고추잠자리, 국화꽃처럼 정겨운 낱말로 남아있어요. 그 언어들은 서툰 알파벳으로 이국생활에 부대낄 때마다 목마른 삶의 갈증을 채워줬어요.
그리움의 골이 더 깊어지면 �낙엽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 내게 주신/ 겸허한 모국어로 나를 채우소서.�라며 김현승의 �가을의 기도�를 읊조렸어요. 깍 깍 까마귀가 울면 올 사람 없어도 기다림에 가슴이 콩닥거렸지요. 우체통을 뒤지며 눈에 익은 자음과 모음이 적힌 정겨운 이름을 찾곤 했어요. 이젠 기다리지 않을 작정입니다. 먼저 가을 편지를 쓸 때가 왔어요. 어제에 목 매지 않는 내일의 편지를 쓰겠어요.
�글을 쓰는 것 외에는 살아온 오십 년 인생을 되돌아볼 방법이 없었다�는 스스로의 독백처럼 이제 돌아가는 방법을 알았습니다.
�창밖에 가득히 낙엽이 내리는 저녁 / 나는 끊임없이 불빛이 그리웠다.(중략) 이제 나도 한 잎의 낙엽으로 좀더 낮은 곳으로 / 내리고 싶다'
황동규 선생님의 가을시를 바칩니다. 낙엽처럼 몸을 부벼대며 따스한 모닥불 지피는 날들 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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